애자일과 HR
(출처 : 인재경영 2019년 5월호 )
Deep Change or Slow Death
퀸(Robert Quinn) 교수가 썼고 1998년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근원적인 변화’가 아니면 점진적 죽음을 맞을 수 있으며, 죽음에 이르는 ‘점진적 변화’ 보다는 근원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다. 점진적 변화는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변화이며 근원적 변화는 벌거벗은 채로 불확실한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한다. 다리를 놓으면서 다리를 건너가는 상황이며 늘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생존하여야 한다고 한다.
우리에게 ‘애자일’은 마치 근원적인 변화를 실천하는 중요한 도구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깁슨의 유명한 말처럼 애자일은 “이미 와 있었으나, 널리 퍼져 있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노출된 많은 국내외 기업이 이미 수십여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 조직관리 방식이며, 매트릭스 조직으로 밖에 운영할 수 없는 산업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상화되어 있는 관리방법이다. 갑자기 유행처럼 번져서 가끔은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통계학과는 어디에 있는가
고(故) 김인수 교수의 거시조직론 교재에 있는 짧은 과제의 내용을 소개한다. ‘ㄱ’ 대학교의 통계학과는 자연과학대학에 있고, ‘ㄴ’ 대학교는 상경대학 안에 같은 과가 있으며 ‘ㄷ’ 대학교는 그 과가 정경대학에 있는데 어느 학교가 적절한 조직인가? 정답은, ‘다 맞다’ 이다. 거의 동일한 과목을 가르치는데 소속 단과대학이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각 학교의 교육 이념과 목적이 전제가 되고, 이미 자연스레 형성된 교수진 등을 포함하는 전통에 따라 이어지고 있어서 무엇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조직 설계 원리에 따라 펼쳐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조직 형태는 크게 기능식 조직과 매트릭스 조직으로 나눌 수 있으며 사업부제 조직도 또 다른 유형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기능별로 직무가 분화되고, 인력이 조직화되는 것이 기능식 조직이다. 고객중심, 상품중심, 지역중심으로 모든 기능을 하위조직화시키는 사업부제 조직이 있고 이들과는 다른 매트릭스 조직도 있다.
기능식 조직은 관리가 용이하고 전문성을 키울 수 있으면 효율적이나 기능이기주의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약점을 갖고 있다. TF나 위원회 등 기능 간 소통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매트릭스 조직은 프로젝트 조직이라고도 하며 프로젝트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하이브리드 형태로 기능 조직도 같이 있으나 이는 관리를 위한 단위이고 사업을 수행하는 주요 단위는 프로젝트이다.
건설회사가 전형적인 프로젝트, 매트릭스 조직이다. 한국에 있는 다국적 기업도 조직구조는 기능식이나 운영방식은 매트릭스 조직이 많다. 건설회사의 구성원은 각자 전문 기능을 갖고 있고 기능 조직 소속이지만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현장책임자의 지휘 감독에 따라 일을 하고 일정기간 주어진 기능을 수행하고 난 후에는 복귀하여 대기한다. 평가는 프로젝트 책임자의 평가와 기능책임자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가 기준은 업적보다는 역량‧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업적은 주로 현장책임자가 책임을 진다.
아파트 재건축현장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수주하는 영업조직이 움직인 후 설계를 하고 토목공사가 끝나면 건축기능이 투입된다. 완성된 후 사후관리 조직이 가동되어 전체 프로젝트가 종결된다. 주거시설은 수년이면 종료되나 다른 프로젝트는 십년 이상 걸리는 일도 흔하다.
3년 전에 한 건설 관련 회사의 프로젝트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전체 인력은 많으나 재택근무자가 무척 많았고 그들의 보상이 현장에 투입된 인력의 약 50%로 운영하고 있었다. 영업이익 확보를 위한 노력과 인력 유지를 위한 접점으로서 이 산업의 특성이기도 하다. 경쟁사도 유사한 인력운영과 보상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가 공인한 수준의 인력이 사내에 없으면 수주가 불가능하여 인력을 보유는 하되 현장에 투입이 안되는 경우가 많아 형성된 관행이다. 다행히 정년이 없어서 60세가 경과하여도 일을 할 수 있다.
다국적 기업의 구성원은 한국의 책임자에게도 보고하고, 별개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나 본사의 소속 기능책임자에게도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 소통 비용이 증가하고 책임소재가 불명확한 경우도 흔히 발생한다. 이런 유형도 매트릭스 조직의 한 유형이다. IT회사, 연구소, 컨설팅 회사 등도 유사한 양태를 보인다. 모두 다 사업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직 구조와 운영방식이다. ‘애자일’은 조직구조론의 시각으로 보면 매트릭스 조직, 프로젝트 조직의 전형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애자일’ 조직에 맞는 HR
일반적 매트릭스 조직은 성과가 집단적으로 창출되므로, 업적은 프로젝트 매니저가 챙기고 구성원은 역량을 기준으로 보상받고 평가받는다. 시장에 따른 보상을 기준으로 하므로 개인별 편차가 심하게 존재한다. 개인의 역량과 지식, 기술의 보유 여부에 따라 처우가 달라져서 개인 몸값을 올리는 역량 개발과 경험 축적을 위한 노력이 강조된다. 대개는 노동 시장이 개방적이어서 이동이 자유로운 편이다. 인건비 비중이 높아서 인력 가동률이 중요한 관리 대상이 되며, 따라서 유휴 인력 최소화와 인건비 최적화를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
현재 ‘애자일’ 조직에 나타나는 현상도 매트릭스 조직과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짧은 프로젝트 계획, 수시 계획 수정, 잦은 프로젝트 포기가 관찰된다. 사업계획 작성도 자주하고 주기도 짧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평가는 업적보다는 동료 관찰 피드백을 주로 하고 기능식 조직의 그것보다 자주 한다. 개인 평가 지표는 정교하지 않고 다소 주관적이다. 보상은 개인별 협상에 의해 진행되므로 전 직장의 수준과 시장 수준이 고려되어 결정된다. 평가가 역량 중심의 다중 원천을 통한 측정이어서 보상 조정이 원활하지 않다. 그러므로 상대평가와 서열화 보다는 절대평가를 위주로 한다. 보상 기준과 평가에 따른 보상 적용 기간도 들쭉날쭉하다.
컨설팅 프로젝트를 수행한 게임 회사의 일이다. 오래 전에 큰 성공을 이룬 게임을 만든 팀‧PM에 대한 보상이 워낙 크고 보상하는 기간이 길어서 내부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십여 년 전에 만든 하나의 게임이 공전의 히트를 쳐서 회사의 재무성과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으나 그 이후 지속적으로 중간 이하의 성과를 보이는 팀‧PM에게 여전히 조직 내 최고의 보상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구성원들과의 형평성과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직도 그런 보상은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라고 한다.
작년 말에 컨설팅 프로젝트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십년 전에 설립한 스타트업 회사인데 지속적으로 인수 합병을 통하여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얼마 전 국내 굴지의 IT 회사로부터 투자도 받았다. 사업부서는 십여 개이며 교육 관련 사업 영역에 집중하는 회사이다. 사업의 특성과 젊은 대표의 지향점, 투자를 한 회사의 운영 방식을 반영하여 조직을 ‘애자일’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1년 전에 입사한 인사 임원(그는 전형적인 대기업 조직 출신)이 아무리 ‘애자일’ 조직이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프로젝트 제안을 요청하였다. 핵심 개선 영역은 높은 이직, 낮은 조직 몰입도, 보상의 형평성 등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경력 사원이 많고, 평가는 역량 중심의 동료 다면평가를 주로 하며 연봉 조정도 임원들이 모여서 결정하고 있었다. 연봉이 결정되는 시기면 이직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생하고 그 진공을 또 다른 경력 사원이 메운다. 사업의 특성에 맞게 ‘애자일’은 유지하되 직접 동기를 강화하고 공정성과 형평성을 다소나마 개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애자일’을 위하여 포기해야 할 것들
‘애자일’ Ability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국내 한 대기업에서는 글로벌리티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업이나 구성원이 얼마나 글로벌한가, 사업 내용, 운영 방식, 구성원의 의식과 행동을 종합하여 그 단어를 쓰며 글로벌리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애자일’이 형용사여서 정확한 단어는 ‘애자일리티’가 적정하겠다는 생각은 있으나, 글로벌리티 점검하듯 ‘애자일’을 할 때 점검해야 사항들이 있다.
우선, 영업이익에 대한 책임을 일정 기간 포기하거나 이미 충분히 안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사업의 재무성과도 예측하기 어려우며 90%는 실패할 수도 있다고 용인되어야 하고 그래도 괜찮으면 ‘애자일’해도 될 것이다. 기존 사업에서의 안정적 영업이익 혹은 충분한 현금 흐름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강을 건너는 다리를 놓을 때 잘못 놓을 가능성이 있고 그 비용을 감내할 수 있어야 강을 건널 수 있는 것과 같다.
다음은, 공정성 확보를 포기하고 성장성을 제공하는 직접 동기부여로 인사관리 효과성 기준을 바꾸어야 한다. 성과관리와 평가가 기능식 조직의 그것처럼 촘촘하지 못하므로 공정성 시비는 증가할 것이다. 기능식 조직의 경우, 사전에 설정할 수 있는 목표와 측정지표가 있는 계획적 성과관리가 가능한데 ‘애자일’ 조직은 환경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하는 것을 사후적으로 측정하거나 보유 역량을 중시하는 역량 중심의 비계획적 성과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논의를 통한 결정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피드백 내용과 보상 조정 등의 불일치가 생길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공정성 지각이 떨어지면 몰입도와 직무만족이 저하되고 이직률이 증가해도 인내할 일이다.
끝으로, 인사기능의 초점이 내부 인사, 노무 관리 보다는 인력 채용과 조직문화로 이동하여야 한다. 직급 부여, 승진에 대한 객관성, 엄격성을 포기하여야 한다. 인건비 상승, 높은 이직률과 여유인력 발생은 그럴 수 있는 현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여유인력이 있지 않으면 ‘애자일’하기 어려우며, 저성과-Free Rider를 보더라도 관대해야한다. 인력이 부족하거나 부족이 예상되는 사업 부서에 적시에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과 팀 작업이 가능한 조직문화 형성, ‘애자일’맥락에서 필요한 리더십 확보와 교육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애자일’
2019년 4월 12일자 중앙일보의 내용이다.
“틀 밖에서 문제 바라보면 답이 보여요.” 그는 “기존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며 “카카오페이지에 100만 파트너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시작했는데 결과가 참담했다. 문제를 정교하게 다시 정의한 뒤, 콘텐츠 업계 최초로 ‘기다리면 무료’ 모델을 만들었다. 또 카카오메이커스는 세계에서 가장 느린 쇼핑 플랫폼이다”라고 틀 밖에서 사고할 것을 강조했다. 드라마와 영화, 웹툰·웹소설 등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는 2013년 거래액 17억 원이 지난해 2200억 원까지 뛰었다. 그가 ‘가장 느린 쇼핑 플랫폼’이라고 소개한 카카오메이커스는 속도경쟁 양상을 보이는 쇼핑업계에서 재고와 낭비 없는 주문 생산 시스템으로 지난해 54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를 검증하고 강을 건너간 ‘애자일’ 조직의 이야기이다. 이 결과를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실패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우리 회사의 애자일’을 인사담당자들은 검토할 수 있다. 검토의 방향은, 전사적으로 할 것인가 부분적으로 할 것인가가 첫째 결정사항이다. 대부분의 조직은 부분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기능 혹은 특정 사업에 국한하여 시범적으로 시행한 후 다음 교각의 위치를 고민하자.
두 번째는 제도적, 구조적 접근인가 아니면 구성원의 마인드 세트 형성 접근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을 고려한 조직문화 접근도 가능하고 위의 예시처럼 조직 구조 및 인사제도적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운영 주기로서 상시적으로 할 것인가 수시‧일시적으로 운영할 것인가를 고려하면 ‘우리만의 애자일’ 지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싸이트그룹
오승훈 대표